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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의 또다른 모습 뉴라이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해 정리하고자 하는데... "뉴라이트"는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글은 몇 해 전 한겨레 한토마에 올라온 필명 "각골명심 님"의 글을 일부 추가 편집 및 수정하여 올리는 글입니다. 좋은 글을 더욱 많은 분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변신(變身)은 이 시대의 필연인가?
중도보수적이며 거기에 자유주의적 기질까지 다분했던 기존의 내 자신이 지난 한 해 동안 발 디디고 있는 이땅의 정치, 사회적 현실을 바라보며 그 암울함으로 인하여 결국 ‘선명한 진보주의자’로의 변신을 시도할 수 밖에 없다는 자못 나로서는 비장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음은 개인적으론 나의 불행입니다. 더불어 이러한 나의 불행이 이 사회의 자그마한 행복의 밑거름이라도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이 글을 쓰려고 의도한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 동안 소위 ‘보수’라는 얼토당토않은 가면을 쓰고 자신들의 정체를 한사코 숨기려고만 했던 이땅의 군사전체주의적 ‘우익’ 세력들이 최근 또 다른 모습으로의 변신(일명 신보수주의:New Right)을 위해 전이(轉移)를 시작하였으므로 이러한 시도가 더 급격히 진행되기 전에 그 실체를 명백히 일반 대중 앞에 밝혀서 이에 대한 대비를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함입니다.

소위 ‘수구들’에게는 쥐약처럼 느껴졌을 이 21C의 정보통신의 발달이 몰고 온 파장은 즉 정보의 빠른 ‘전파와 공유’는 필연적으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자신들의 추악한 실체의 결과가 가져올 몰락에 대한 불안감으로 증폭되었을 것이며, 이는 다시 그들에게 있어 근본적으로 생존에 대한 일대 ‘대재앙’의 위기감으로까지 받아들여졌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여 그들에게는 이것을 해소하고 지속적인 지배에 대한 욕정을 수반할 수 있는 그럴 듯 한 근거로서 아주 탄탄하고 적절한 이론적 뒷받침이 절실했을 겁니다. 그 결과 그들의 구미에 너무도 딱 맞는 7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발발하여 일대 선풍을 일으켰으며 지금도 그 연장선상에서 더욱 맹위를 떨치고 있는 소위 ‘신자유주의’의 시발점이 된 ‘신보수주의: New Right’ 이론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것 같은 반가움으로 다가왔을 것은 주지의 사실일 겁니다.

주목할 것은 이 이론이 현재 우리나라 수구들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일본에서도 차용되어져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 있어 심대한 위협으로써 현실화 되고 있는 시점이란 건데, 그것은 이 이론이 한마디로 ‘자유로운 경제와 강한 국가’를 그 모토로 하는 것으로서 지금 일본이 미국의 양해 하에 깊숙이 진행하고 있는 ‘군사대국주의화’와 또한 경제적으로는 세계화라는 명목 하에 아시아 국가에 대한 심각한 자본의 수탈이라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화’의 두 가지 큰 축으로써 실질적으로도 우리나라를 압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경계하기는커녕 오히려 호응을 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 하나의 사실이자 실체인 FTA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뉴라이트전국연합, 한반도선진화재단 등 신보수를 표방한 뉴라이트에 대한 비판서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70년대 중반 ‘세계자본주의의 위기’가 된 오일파동, 재정위기, 스태그플레이션의 만연에 의해서입니다. 기존의 케인즈 주의에 바탕을 둔 복지국가지향의 형태, 즉 노동조합과 사회민주주의의 힘을 배경으로 성장한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에서의 포디즘형 성장에 제동이 걸리자 그 돌파구로서 케인즈 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등장한 이론입니다.

그러나 복지국가와 함께 케인즈 주의가 가지고 있던 또 다른 파트너 ‘군사국가’에 대해서는 수용의 입장을 취하는 두 얼굴을 가진 ‘신자유주의’는 결국 ‘자유로운 경제’의 이름으로 ‘복지국가’를 적으로 돌렸으며 ‘강한 국가’의 이름으로 ‘군사국가’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물론 다행히도 오바마 정부가 들어서 일부 변화가 감지되고 있으나, 기본적인 틀로 구축된 제반적 환경은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것은 다분히 그때까지 존재한 공산. 사회주의에 대한 견제의 의미가 작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그것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시장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민주주의의에 대한 제한으로 이어졌습니다.

후 90년대 들어 구 소련체제를 필두로 동구권이 몰락하고 냉전이 종식되자 그 화살은 내부적으로 ‘복지국가적 개혁’을 주적(主敵)으로 돌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세계화라는 그럴듯한 포장으로 강력한 군사력과 거대자본으로 무장한 미국을 필두로 이들은 ‘자유로운 경쟁’을 외치며 자본의 융단폭격으로 남미 국가들에 이어 우리도 함께 경험한 ‘IMF 사태’와 같이 아시아 국가들을 초토화시켰고, 이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거대자본에 의한 ‘경제적 식민지’로의 전락을 의미합니다.

노먼 촘스키 교수의 말대로 “세계화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어떤 종류의 세계화냐, 누구의 이해관계에 따른 세계화냐 이다”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물신주의를 유일한 가치로 내세우는 ‘신자유주의’는 이제 바야흐로 통제불능의 폭주기관차가 되어있고, 이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제어하고 극복해 내느냐가 아마도 남은 세기에서 우리를 비롯한 세계인류의 생존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수구세력’들은 이것을 다시 끄집어내어 자신들의 치부를 정당화하고 나아가서 영구적인 힘의 무기로 삼으려 합니다.

몇 가지 점에서 이것은 그들에게 아주 유용한 것처럼 보입니다.

첫째,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의 제한과 축소를 지향한다.
자유시장주의를 강조하여 경쟁을 정당화합니다. 이는 그들이 가진 자본의 힘에 의해서 다시 국가권력을 통제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이미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정부는 기업에 끌려 다니고, 거기서 노동시장은 더욱 황폐화 되고 있으며, 부의 편중으로 인한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어 갑니다. 지난 시절 참여정부가 본래부터 내세우는 ‘민주주의의 확대’는 이들에게 심대한 위협 이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번번히 내세워왔던 ‘포퓰리즘’ 이라든지 ‘과잉민주주의’ 라든지 또한 시민단체들에 대한 공격의 수단으로 내세웠던 ‘이익집단 민주주의’ 같은 것은 모두 이러한 이론적 근거에서 나온 듯 합니다.

이것은 과거 그들이 저질렀던 ‘군사독재’에 대한 정당화를 꾀하고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민주주의에 확대에 대한 견제일 뿐 아니라 위기에 처했던 노무현 정부를 더욱 곤경에 몰아넣어 그 반사이익으로 영구 지배를 꿈꾸는 고도의 계산 아래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신자유주의는 냉전체제 하에서 복지국가체제를 적으로 돌렸다.
즉 공산,사회주의에 대한 효과적 견제를 위해서 ‘군사국가’를 지향해 왔습니다.
이것은 불행히도 유일하게 한반도에서는 여전히도 그 냉전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들이 틈만 나면 내세우는 ‘색깔론’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복지국가체제’는 자본주의에서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 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원리인 ‘자유로운 경쟁’이란 의미에서 보면 복지제도들이란 부당하기 짝이 없다는 겁니다.

사회주의와 노동조합 같은 원리와 힘을 배경으로 발전해 나가는 복지제도는 그 자체로 국가의 비대화와 재정적자를 동반한다고 그들은 믿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비록 시대의 흐름상 표면적으로는 정면에서 ‘민주주의’를 부정하지 못하는 대신
-자세히 들여다보면- 좀 개념이 다른 왜곡된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듯이 복지제도 또한 소위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좌파정부’라 호도하면서 실제 보면 아주 미미한 선에 그치고 있는 현실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그저 지나치게 분배를 강조한다고 지레 엄살을 떨었던 것이고, 현 정부 들어서 복지예산을 축소하고 개발예산을 확대하는 것 역시 이러한 차원의 동일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본 글의 결론을 대신하여 세계적 석학인 노먼 촘스키 교수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아래에 일부 발췌해 놓음으로써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신자유주의는 속임수일 뿐>>
지식인들은 대개 기존 체제를 압도적으로 지탱합니다.
소수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소외되지요.
지난 20~25년 동안의 사회정책은 경제법칙이 아니라
부와 권력을 소수에 집중시키려는 국가정책에 의해 디자인되어 왔습니다.
그 결과 극소수만이 동화 속의 번영을 노래하고,
나머지 대다수 국민은 가난한 잉여인간으로 살아가게 됐습니다.
그렇게 극도의 빈부격차가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히 일어난 결과가 아니라, 정치적 결정에 의해 고안된 것입니다.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지요.

물론 우리는 지금이라도 이것을 막아야 합니다.
먼저 신자유주의 담론에는 엄청난 속임수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현재 시점에서 어떤 부문은 신자유주의 질서에 굴복했고, 어떤 부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초국적 기업은 신자유주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데,
이 점은 마치 전통적인 자유주의와 같지요.
한마디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시장원리가 적용되지만,
부자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사상의 핵심은 그러니까
당신이 만일 제3세계에 살고 있다면
시장원리에, 경제법칙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만일 부유한 특권층이라면
당신은 공적 자금의 지원을 받을 수 있고, 그 비용과 위험부담은 모두 사회로 이전됩니다.
이럴 수 있는 장치로 국제통화기금(IMF)과 같은 금융기관이 있습니다.

IMF는 외환위기에 처한 나라들을 ‘구제’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런 국제금융기관들은 결국 (외환위기를 겪은 국가들에 투자한) 투자가들을 구제한 것이고,
해당 국가 국민들에게 극심한 비용을 전가함으로써
은행가와 투자가들이 이익을 보게 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험의 사회화입니다.
부유한 투자자는 위험한 투자를 하면서, 공적 부문이 그 위험을 보전해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뭔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IMF와 같은 기관이 나서는 것이지요.
미국은 생산과 연구개발에 국가가 주도권을 행사하고,
따라서 비용도 사회적 전이가 용이하지만, 이득은 사기업이 차지합니다.
사기업들은 시장원리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사기업은 본질적으로 전체주의적 내부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기업은 하향식 의사결정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오직 경영자나 소유자만이 명령과 결정을 내리고, 아랫사람은 그저 그것을 집행할 뿐입니다.
초국적 기업들은 정부와 달리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며,
웬만한 국가들보다 덩치가 더 크고 강력합니다.
소위 무역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40~50%가 이들 초국적 기업의 내부거래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 말은 이것은 자유무역이 아니라 통제무역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기업간 전략적 제휴를 통해서 가령 IBM과 도시바가 합작을 하기도 합니다.
시장원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조직적 프로그램이 이러한 합작을 통해 강화됩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합작 기업들은 강력한 국가의 공공지원을 받고,
위험비용은 사회로 이전시키며, 시장원리를 회피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고안해냅니다.
이렇게 해서 신자유주의는 현실이 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됩니다.


그러면 대안은 없는가?
시장원리가 힘없는 사람들에게만 선택적으로 적용되고,
부유층과 특권층에는 무용지물인 신자유주의에 대안은 없는 것일까요?
한 가지 가능성은 누구든지 시장원리에 복종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물론 부자들은 절대로 시장원리를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겠지요.
따라서 올바른 대안은 모든 사람이 시장원리를 받아들이도록 사회적으로 강제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방안이 강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은행가나 투자가에게만 이익이 돌아가지 않고
모든 국민에게 이익이 분배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억압과 파괴의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십니까?
생태계의 파괴로 우리 손자들이 더 이상 살 수 없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까?
한편에서는 유례없는 경제적 부를 누리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그런 세상을 우리가 원합니까?
아니면 이런 세상을 바꾸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은 이제 선택을 해야 합니다.




※ 본 글은 "기 발행 포스트 재정리를 위한 비공개 전환 공지"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전 운영했던 블로그 텍스트큐브의 서비스가 중단됨에 따라 티스토리로 이전을 하게 되면서 개인 도메인을 사용하기 전 발행했던 포스트들의 소실된 링크 등 문제를 개선함과 동시에 지난 포스트들을 새롭게 정리하는 차원으로 기존 발행했던 일부 글 내용을 수정하여 재발행하는 포스트입니다. 보시는 분들의 넓은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 최초 발행일 : 2009.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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