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단발령

생각을정리하며 2015. 4. 30. 18:26 by 그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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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 가득 덥수룩하게 수염을 길렀던 적이 있습니다. 한 5년 전쯤의 일이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고 매일 면도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 불필요한 행동이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부수적으로는 그것도 자기 멋이라고 나름 괜찮아 보일 것이라는 착각도 한몫했음을 부인하진 않습니다. ㅠ.ㅠ


유독 얼굴에 털이 많아 하루 정도만 면도를 하지 않아도 입과 턱 주위가 시커멓게 보이는 지라 한 두 달만 면도를 하지 않아도 제법 풍성한 구렛나루[각주:1]가 됩니다. 그렇게 제대로 된 털보가 되어 그 모습이 제모습인 듯 느끼기 시작했을 즈음입니다.


이미지 출처: thebeardedman.net



본가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제 모습에 다들 놀라는 기색이었죠. 우습기도 하고, 어색해 보였는지... 개의치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는 듯 한 가족들의 눈길이 그렇게 부담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런 거고... 


정작 문젠 우리 가족 대장(?)으로 가장 높은 상전이신 아버지의 노여움이었습니다. 물론 젊으셨을 때였다면 소리소리~ 치시며 우격다짐(?)하시듯 매몰차게 혼내셨을 테지만 제 얼굴을 보시고는 썩은 미소를 머금은 눈빛과 입가에 경련이 느껴지면서 "빨리 털 깎고 오지 않으면 너 가만두지 않겠다"하시는 듯한 무언(無言)의 압박이... 내색하진 않았지만 정말 무서움 자체였습니다. 


그렇게 잠시 제 모습을 보신 후 바로 욕실로 들어가시더니 여행과 같은 출장에서 수집(?) 해 오신 마딘 차이나(Made in China) 일회용 면도기 뭉치를 냅다 제게 던지시더군요. 그 즉시 꼬랑지 내리고 바로 얼굴의 털들을 아주 싹싹 깨끗이 밀어내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털이 또 뭐라고 얼마나 아깝던지... 게다가 보수적이신 아버지께선 왜 유교적 사상에 근거한 身體髮膚 受之父母(신체발부 수지부모)를 깨고 계실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보수적이신 아버지께서 유교적 전통을 따르고자 했던(?) 저에 대한 단발령이었던 샘입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보수란 일률적으로 고정된 모습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 ㅠ.ㅠ 


아~ 아니 잠관만요~! 

이게 머리가 아니라 수염을 깎은(인) 거니까... 엄격히 말하면 단발령은 아닌 건가요? ㅎ

  1. '구레나룻'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합니다만... 그 근거 제시가 미약하여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발음 그대로 표기합니다. ㅎ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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