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산울림을 좋아해서 공감하는 마음으로 간직하고 있던- 다른 분의 글을 토대로 한 포스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1993년 인터넷 BBS KIDS에 서광식(Macroft)님께서 올리셨던 글로, 산울림을 좋아(하는)할 분들과 함께 생각의 공유와 공감을 더하고자 일부 내용을 수정 및 추가 하여 다시 올립니다. -그러고 보니 이 글이 인터넷 공간에 올려진지도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네요. 물론 산울림의 시간으로 보자면 33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 -
저 보다는 적어도 10년 여 -많게는 20년- 의 나이가 많은 산울림 맴버들이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써 산울림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과 또 한편으로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벅차기도 합니다. -아마도 추앙한다는 것도 인위적이거나 어떤 자의적 힘이 없다는 측면에서 이와 비슷한 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마음의 느낌으로 그들을 좋아했던 분들께는 추억을, 또 혹여 아직 -산울림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분들께는 이런 멋지고 좋은 락그룹(음악인)이 우리에게도 있다(있었다)는 것을 알게되는 내용이 될 수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옮겨 놓습니다.
더불어 20년 가까운 오랜 시간이 흘렀고 한번 봰 적도 없습니다만, 진정성과 순수한 시각으로 산울림에 대해 인터넷을 통하여 글을 남겨주신 서광석님(Macroft)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한편으론 혹시라도 이글을 서광식님께서 보신다면... 어떠실지도 궁금해집니다. ^^*
※ 오래된 글을 일부 편집하며 작성을 하다 보니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듯 느껴져, 읽으시면서 조금 혼란스러울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좋은 음악에 대해서 더 많은 분들이 접할 수 있는 의미로 너그러히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또한 시간이 적지 않이 흐른 만큼 세월의 공백에 대한 추가 및 수정이 불가피하게 있을 수 밖에 없었음을 먼저 밝혀드리며, 글을 수정하고 가미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생각과 느낌이 추가된 부분이 적잖이 있다는 점도 말씀 드립니다. 물론 이것이 인터넷의 알흠?다운 미학으로 승화되는 가치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
참고로 읽는 분의 혼란을 조금이나마 덜어 드리기 위해 아래 글의 부연적 설명에 있어 "-" 줄표시가 있는 문구의 빨간색은 서광식님의 글이며, 파란색 계열의 글씨는 저의 생각을 추가적으로 삽입한 내용입니다. 또한 서광식님의 글과 일부 다르다고 생각한 사항에 있어서는 괄호()표기로 내용을 추가 하였습니다.
보낸이 (From) : Macroft (서광식)
시 간 (Date) : 1993년11월10일(수) 8시21분39초
제 목 (Title) : '산울림'론......!
수많은 음악을 들어오면서, 많은 음악/노래를 사랑하였지만 이제는 조금씩 잊혀져가는 음악들이 다시 그리워집니다. 한때는 무척 좋하하였던 노래가 이제는 나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잊혀져 간다는 것... 무척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런 안타까움을 조금이나마 줄이고자 나의 음악사(?)를 조금씩 정리하고픈 생각이 듭니다. 다시 옛날의 그 기쁨과 흥분과 감동의 느낌이 되살아나기를 빌면서...
■ 산울림의 모든것
아마 제가 가장 처음에, 편집증(?)을 보이면서 광적으로 좋아하였던 음악가 (musician)는 '산울림'이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회상", "너의 의미", "내게 사랑은 너무써" 등 단순한(?) 감미로운 발라드만 불렀을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처음으로 rock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던, 아니 '음악'을 알게 해 주었던 그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때는 그들이 발매한 15장 가량의 앨범에 수록된 노래 모두를 외워 부를 정도로 무척 좋아 했던 그룹입니다. 얼마 전 -93년을 의미합니다.- '재결합'이라는 충격적인(?) 뉴스를 접한 이 시점에서 그들의 음악을 한 번쯤 돌아보는 것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1. 우리나라 rock의 역사
우리나라의 rock역사는 '걸어서 하늘까지'에서 신나는 기타를 친 신대철氏(이후에서는 존칭생략)가 아닌 바로 그의 아버지 신중현에 의하여 60년대에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국내 가요계 환경에서는 그의 음악이 사이키델릭하게 보여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rock의 신념 -당대의 사회상을 어떠한 형태로든 표현했다는 점에서- 은 충분히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의 그룹들은 후속타의 빈곤과 멤버간의 견해 차이로 해체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중 '블랙 테트라'와 '활주로'가 규합하여 출발한 '송골매'는 젊은이들의 음악세계와 공감대를 형성하며 80년대 초반 rock 시장을 독점할 정도로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모방주의의 타성과 매너리즘에 빠져 그룹 자체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후속 곡에 허덕이는 상황에 이르러 세월 속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자유의 바람과 함께 등장하는 정통 hard rock group들의 활동이 시작됩니다.
TV에는 출연하지 않고 몇 개월이나 쉬지 않으며 공연 투어를 시도했던 metal ballade의 선봉 '들국화'와 다분히 pop적인 우수가 깃든 대학생 그룹 '다섯손가락'의 등장은 상당히 획기적인 사건이었고, 이들의 영향으로 꺼져가던 그룹 사운드의 열풍이 다시 살아나면서 정통 hard rock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린 것은 매우 아이러니컬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후 heavy metal group '시나위', '백두산', 그리고 약간 성격을 달리 접목시켜 rock의 새로운 쟝르를 개척한 '부활', LA metal을 국내에 소개한 'H2O' 등의 group을 비롯해 rock의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rock group이 under에서 활동하였습니다.
※ 위의 글은 자료 부족으로, '삼호출판사'에서 1987년에 출판한 '레코드 신곡 속보 '산울림편'에서 한국 rock의 역사에 대한 글을 '대부분' 인용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다음의 '산울림'의 글도 위 책에서 '일부' 인용함을 역시 알려드립니다.
'아니벌써... 해가 솟았나... 창문 밖이 환하게 밝았네...' rock이 그다지 대중화 되지 못한 70년대에 산울림의 '아니벌써'는 신선한 충격과 함께 국내 가요계를 흔들어 놓았고, rock의 대중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김창완(v, g), 김창훈(b, k), 김창익(d) -2008년 1월 29일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사망- 으로 이루어진 형제 rock group -이건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건 음악그룹으로써 형제애와 마음적으로 호흡하고 조화를 이뤄내는 요인으로 작용함으로써 완성도 높은 음악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바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이 처음부터 직업적 rock group이 되기 위해 앨범을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93년 여름 그들이 재결합을 발표하며 '조영남 쇼'에서 말하기를, 72년 경에 김창완이 집에 500원짜리 기타를 들고와서 형제끼리 노래를 부른 것이 그들 음악의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얼마 후 김창훈이 기타를 하나 더 장만하자, 할 것이 없는 막내 김창익은 전화번호부와 노트 등을 방바닥에 놓고 형들의 기타 반주에 맞추어 드럼 흉내를 내면서 그들 나름의 음악을 표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77년 김창완이 대학 졸업을 하면서 - 취직을 하려는 마음으로- 그동안 작곡 해 놓은 약150여 곡들이 아까워 마지막 정리하는 기분으로 그들은 한장의 앨범을 내기로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레코드 회사가 녹음을 허락하였고, 녹음 날 취직 시험이 있었던 김창완은 과감히(!) 녹음에 참여하기로 결정을 하면서 '산울림'은 정식으로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됩니다. 산울림이 탄생한 날이기도 합니다.
1집의 성공으로 그들은 다시 한 번 앨범을 낼 기회를 갖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2집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입니다. '실험적 progressive rock sound'라는 평을 받은 이 앨범은 산울림을 국내 가요계의 앞서가는 group으로서 자리를 완전히 굳히게 만들었습니다.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중을 의식하지 않고, 그들의 실험성이 가장 잘 표현된 앨범, 3집 <내 마음>을 발표하게 됩니다.
당시로써는, 아니 현재도 국내 가요계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18여 분에 달하는 초유의 대작 '그대는 이미 나'는 B면을 모두 차지하는 국내 가요계의 상식을 뒤엎은 곡이었으며, '나 어떡해'를 원작자로써 당당히 리바이벌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개구장이'를 발표하여 그들의 순수한 음악의 표출구 -동심- 를 찾고자 하는 노력도 있었습니다.
3집이 나온 직후 산울림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듯 하여 당시 TBC 가요 대상에서 중창단상 -표현이 조금 이상하지만- 을 받았습니다. '79년에 창훈, 창익의 군입대로 인하여 큰 위기를 맞이하였지만 김창완의 고군분투로 4, 5, 6집이 계속 나오는 바람에 무난히 공백을 매울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4, 5, 6집은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79년 4월부터 80년 5월까지 만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앨범을 3장 이나 낸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그 음반들이 정성을 들이지 않은 것도 아니고, 타 가수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기존 앨범에 비해 음악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조영남 쇼'에서 김창훈이 말하기를 1년이란 기간 동안 3장의 앨범 발매가 가능할 수 있던 이유는 군입대를 하기 전 이미 3장의 앨범 모두 녹음을 마친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81년 창훈, 창익이 다시 복귀하여 그들은 7, 8, 9, 10집을 내놓으며 다양한 변화를 시도합니다. 하지만, 처음의 생각대로 직업적인 rock group이 될 생각은 없었기에, 창훈과 창익은 각각 해태상사, 대우자동차에 취직을 하면서 음악계를 떠나게 되고, "산울림=김창완" 이라는 솔로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일본의 음악 전문지에서도 '세계 수준의 천재'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김창완은 오랜 공백을 깨고 86년 '산울림'이라는 이름을 내놓게 되며, 다시 물밑 잠수를 하였다가 92년 12집을 발표하면서 그는 음악적 변화를 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11집에서는 포크라는 새로운 색채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동안 김창완은 '꾸러기', '동물원'과 같은 후배 그룹들을 양성하면서, 작곡가, 드라마&영화 음악가, 음반 기획자 등으로도 활동 하였으며, <기타가 있는 수필>과 같은 솔로 앨범을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김창완에 버금가는 음악성을 보여 줬던 김창훈은 비록 음악계를 떠났지만 85년 김완선의 데뷰앨범과 2집 앨범의 음악 제작을 맡기도 하였으며, 93년에는 그동안 자신이 써오던 음악을 모아서 독집 앨범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93년 여름, 대학가요제 출신 가수들의 모임이 주최한 남이섬 콘서트에서 무려 10년 만에 라이브 공연을 보여준 산울림은 이에 그치지 않고, 완전히 재결합하여 새앨범을 내겠다고 발표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영남 쇼'에 출연하여 그들의 주옥같은 곡들을 직접 연주하기도 하였습니다. 솔직히 제가 산울림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해체되고 난 뒤였기 때문에 김창완 혼자가 아닌 그들 모두가 연주하는 것은 이때 처음 보았습니다. 비록 40을 바라보는 -이젠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셨죠?- 나이들이지만 그들의 연주는 그 어느 rock밴드에 못지 않는 연주였다고 생각합니다. dance music이 난무하는 요즘의 -90년대의 음악은 주로 그랬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국내 가요계에서 그런 순수한 음악을 하는 음악가들을 보기 어렵다는 아쉬움이 그때 들었던 솔직한 생각입니다... ;-)
산울림의 음악은 어떠 어떠하고, 어떠 어떠한 성격, 색채 등이 있다...라고 쓰고 싶지만 솔직히 제가 음악의 전문가가 아닌이상, 저의 느낌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
제 친구는 산울림을 '한국의 비틀즈'라고 비교를 하지만, 굳이 비교를 하자면 저는 '한국의 퀸'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아니 퀸이 '영국의 산울림'인가? :) 제가 퀸에게서 느끼는 이미지가 산울림에게서 느끼는 이미지와 조금 비슷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무엇보다도 산울림의 음악적 특성 중 가장 두드러진것은 바로 '순수성'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너무 오래되어서 제목과 가사가 잘 기억이 나지않지만 그들의 노래가사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
'나는 당신을 너무 사랑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너무 큰것을 원하고 있어요. 추운 겨울날에 가시밭길을 헤쳐 나갈 수는 있지만, 달을 따오라는 것은 너무 하잖아요?'
그들의 '순수성'은 '음악적인 추구'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겁니다. 솔직히 소위 대중음악들은 '음악'을 위한 음악은 많이 찾아 볼 수 없고, '인기'를 위한 음악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더구나 가수가 탤런트인지, 개그맨인지, MC인지... 도대체 알 수 없을 정도니까요. 또한 '음악적 재능' 때문이 아닌 '외모'때문에 가수로 나설 정도니... 물론 가수가 재능이 많아서 여러가지 일을 할 수도 있고, 음악만 사랑한다면 '재능'이 없어도 가수가 될 수 있겠지만, 과연 그들이 '순수한 음악'을 추구 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점이 남습니다.
그렇지만, 앞에서 이야기 하였듯이 산울림은 데뷰때 부터 결코 직업이나 인기를 위해서 노래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만의 '음악'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추구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들이 추구하는 음악에 대한 만족을 어느정도 얻었기에 미련없이 '산울림'을 떠날 수 있었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럼, 왜 재결합하냐고 궁금해 하실 분이 계실텐데, '조영남 쇼'에서 밝히길 그들은 가장 만족을 할때 떠났지만 언제가는 다시 그들의 음악을 추구할 때가 오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순수한 음악 추구'에 의해 그들의 음악은 많은 '실험성'을 보이게 됩니다. 그들의 음악을 살펴보면, 현재의 국내 가요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실험적인 곡들이 많습니다.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와 같은 곡은 3분 여에 달하는 연주(전주)가 있으며, '떠나는 우리님', '청자'와 '백자'와 같은 곡들은 전통 가락과 현대 음악의 결합을 시도하는 주목할 만한 곡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 가요에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참신한 감각의 음악들을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가수나 그룹이 '그들만의 음악'을 가질 때 좋아하게 되는데, 바로 산울림은 그들만의 음악과 색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즉, 내가 들어보지 못한 산울림 노래라도 그 노래의 느낌에서 '산울림 음악'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는 겁니다.
6. Discography of 산울림
사실 discography는 각 앨범과 수록 곡을 싣는게 정석(?)인데, 산울림의 모든 앨범이 집에 있는 관계로 수록 곡은 정확하게 적지는 못하겠습니다. 따라서, 1~11 집까지는 앞에서 언급한 책의 평을 인용하고, 나머지는 저의 기억을 살려서 각 앨범별로 간단한 소개를 하겠습니다. 이점 양해바랍니다.
[정규 앨범]
1집 <아니 벌써> : 77년 12월 15일
앨범 뒷면의 설명을 보면 'dynamic sound, 생동감 넘치는 리듬 터치, 개성적인 맬로디의 진행과 창법'이라고 설명해 놓았는데, 그 당시로서는 우리 가요계에서 쉽게 들을 수 없는 획기적인 기념비적 앨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하나의 앨범에서 한 두곡의 싱글을 위주로 앨범을 만드는 우리 가요계에 비하여 이 앨범은 앨범 전체가 하나의 작품으로 완선 된 명실 상부한 '앨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구어체 문장 그대로를 가사로 사용해 위트와 파라독스가 생동감 있게 표현된 노랫말 역시 우리 가요계 발전에 커다란 시금석이 되었던 사건이었습니다.
1집에서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아니 벌써'와 '문 좀 열어줘'. '불꽃놀이' 등이 인기를 끌었지만,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꺼야'와 '안타까운 마음'과 같은 곡들은 산울림의 개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앨범 자켓을 보면, 자켓의 1/4이 조금 넘는 크기의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이 왼쪽 중간에 있고, 그 오른쪽에는 그들의 이름'산울림'을 특이한 글씨체로 적어 놓았습니다. 주목할 점은, 이 자켓의 포멧이 12장의 정규 앨범이 나오면서 한번도 바뀌지 않다는 점입니다. 다만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 내용만이 바뀌었는데 -그림은 계속 크레용으로 그렸으며, 소문에는 김창완이 직접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아직도 가수의 사진을 앨범 자켓에 싣는 것이 대부분인 것을 생각하면, 첫 앨범의 자켓에서 부터 그들은 이미 앞서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집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 78년 5월 10일
'네 마음에 주단을 깔고'와 '어느날 피었네'와 같은 곡은 전주가 2~3분이나 되는 프로그레시브적인 곡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떠나는 우리 님'은 전통 가락을 현대적으로 변형 시킨 곡으로, '둘이서'와 함께 산울림 초기의 대표적인 발라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창훈이 만든 '나 어떡해'는 원작자가 포함된 산울림에 의해 리메이크 되었는데, 그건 산울림의 특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노고지리가 부른 '찻잔'과 임지훈, 이선희가 부른 '누나야'와 같은 곡들을 원작자의 느낌으로 다시 리메이크(커버?)한 것은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 음악의 범위와 다양성을 넓혀준 또다른 실험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의미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산울림의 음악은 바로 그러한 실험적 자세에서 출발함으로써 음악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4집 <특급열차> : 79년 4월 15일
타이틀 곡 '특급열차'는 추송웅의 연극에 사용되었고, '카멜레온' 역시 연극 '제2의 관계'에 사용된 곡입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소', '풋내기들의 합창', '가을에 오시나요'는 라디오 연속극의 주제가였고 '거인의 숲'은 TV 연속극의 주제가였습니다. '유리인형' '어디로 갈까' '내일 또 내일' '바람 부는 강 언덕'은 산울림이 음악을 담당했던 임권택 감독의 영화 "내일 또 내일"에 사용된 곡입니다.
5집 <한낮의 모래시계> : 79년 9월 20일
7집 <가지 마오> : 81년 8월 1일
8집 <새야 날아> : 82년 5월 25일
9집 <웃는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어> : 83년 1월 10일
11집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86년 9월 10일
13집 <무지개/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97년 2월 1일
※ 13집에 대한 내용은 서광식씨께서 작성한 이후 발매된 앨범이기에 이번에 새로 추가한 내용입니다.
산울림의 마지막 정규앨범으로 산울림이란 이름으로는 이제 더이상 음악이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기에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는 앨범입니다. 산울림이란 이름이 전설로 남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텐데... 담겨 있는 음악들은 그 마지막이라는 것을 반어적이고, 역설적으로 표현하려는 듯 노래들의 제목들 부터가 어떤 마지막이란 느낌은 들지 않을 만큼 그간의 산울림만의 느낌 그대로입니다.
처음 듣고는 초기의 산울림을 느끼게 했던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를 비롯해 '나도 너처럼' -생각하고 들어서 그런지 '나도 너처럼'이란 노래는 가사에서 산울림이란 이름을 보내고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실황음악으로 실린 '가지마오'가 그 마지막을 아쉽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FAX 잘 받았습니다' 등은 정말로 산울림 다운 산울림의 색채가 고스란히 깃들어 있습니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비틀즈나 E.L.O(Electric Light Orchestra) 등의 유명 그룹들 대부분은 13번째 앨범이 끝이었거나 인기가 끝났다고 하는 팝음악의 징크스가 있었다는 사실이 산울림에게도 적용된 것인가... 의아함이 들기도 합니다. 그것을 짜맞추려 한건 아닐텐데 말이죠.
[그 외 앨범들]
<기타가 있는 수필> : 83년 10월 15일
김창완의 솔로앨범으로써 말 그대로 어쿠스틱 기타의 연주와 함께 김창완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어울리는 앨범입니다. '어머니와 고등어'가 널리 알려졌지만, 그 외에 '그래 걷자' '초야' '당신이 날 불려주기 전에는'과 같은 조용한 노래가 가슴에 와닿습니다. 특히 '초야'는 실제로 '신혼 첫날밤'에 부르기 딱 좋은 사랑을 고백하기에 좋은 노래입니다. '꿈'과 같은 토크송도 주목할 만한 노래입니다.
<동심의 노래>
동요곡집 <개구장이>와 비슷한 동요모음 앨범으로써 '산할아버지' '꼬마 인형에 날개를 달자'와 같은 곡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의 순수한 노래를 가슴 깊게 느낄 수 있게 하는 앨범입니다.
**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Macroft (서광식)
▣------------------------------------------------------▣
※ 다른 분의 글을 새롭게 다룬다는 측면에서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고, 세월을 포함해서 이것 저것 감안하며 글을 전개한다는 것 또한 새로운 경험이기도 하였습니다. 부족한 글이나마 기록에 남을 만한 가치있는 산울림이라는 그룹 -이제 김창완 밴드로 이어지는- 에 대하여 다른 분들과 함께할 수 있는 글을 새롭게 하였다는데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합니다. 글을 보시고 시간이 나신다면 잠시 산울림의 노래를 들어보시는 건 어떠실지 살짝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산울림의 노래들을(연속재생 또는 좌우 화살표로 곡 이동으로 청취가능) 유튜브를 통해 아래 첨부하며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_ _)
글을 인용하실 경우 따뜻한 댓글(또는 트랙백)과 원문의 출처 및 링크는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_ _)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더 많은 분들이 보실 수 있도록 추천과 RT 부탁드립니다.
'디지털이야기 > 음악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친구가 전해 준 알지만 몰랐던 노래 이야기 (2) | 2015.01.12 |
---|---|
스마트 세상이 아니었다면 지아비는 없었겠지?! (0) | 2014.07.31 |
김C의 노래 "고백"과 Beatles (12) | 2011.01.18 |
광석이 형을 생각하며... (4) | 2011.01.06 |
프리실라 안(Priscilla Ahn)의 노래에 반했습니다. (6) | 2010.11.28 |
사람사랑, 지구사랑.. 붐디아라(boom dee odda) (2) | 2010.11.11 |
젊은 비틀즈의 추억 (6) | 2010.10.20 |
새롭게 와 닿은 노래 "제주도 푸른 밤" (6) | 2010.04.16 |
크리스마스 특집 ☆★☆ 비틀즈Beatles 캐럴모음 (4) | 2009.12.24 |
안단테 처럼... 천천히 Adante Adante... (6) | 2009.09.12 |
|